빗줄기가 굵어지면서 국립현충원 인근 인천 방향 2차선 도로 위 차량들은 가다 서기를 반복했다. 쏟아지는 잠에 눈이 반쯤 감겼다. 그때였다. 전방에서 한 남성이 이천수의 차량을 지나쳐 도망가듯 앞으로 내달렸다. 그 뒤를 한 택시기사가 뒤쫓았다. 택시기사는 앞의 남성을 잡아달라고 외쳤다. 이천수는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하고, 곧장 차에서 내려 택시기사와 함께 남성을 쫓았다. 지 씨도 차를 갓길에 세운 뒤 추격전에 가세했다. 지 씨는 몇 해 전까지 K리그에서 수비수로 활약한 프로축구 선수다.
남성은 차를 사고 현장에 버려둔 채 도망한 것이었다. 이천수는 약 1㎞ 추격한 끝에 올림픽대로와 동작대로 분기점 인근에서 남성을 붙잡았다. 이날 오후 10시 26분께 사고를 낸 A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 취소 기준인 0.08% 이상으로 측정됐다. 이천수는 택시기사를 진정시킨 뒤,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남성을 넘겼다. 뒤늦게 이천수를 알아본 택시기사는 거듭 감사 인사를 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천수는 "현역 시절이었다면 더 금방 잡았을텐데, 슬리퍼 차림이어서 생각만큼 빨리 뛰지 못했다"면서 "유명 선수 출신이고 지금은 방송도 많이 하는데 마스크나 모자를 쓰고 추격할 생각을 못했다. 비에 머리와 얼굴이 다 젖었지만, 누군가를 도울 수 있어서 보람을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 그 상황에선 누구든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아무도 모를 줄 알았는데, 마치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알려져 쑥스럽다"고 말했다.
이천수의 활약에 팬들은 온라인상에서 난리가 났다. 한때 '그라운드의 악동'으로 불린 데다 최근엔 유튜브를 통해 젊은 팬과 소통하는 친숙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남을 위해 달리는 모습이 멋지다" "그라운드엔 손흥민, 그라운드 밖엔 이천수" "저 정도 스피드면 현역 복귀하라" 등의 칭찬을 보냈다.
2002 한일월드컵 4강 주역으로 특급 공격수로 이름을 날린 이천수는 이강인(22·마요르카)에 앞서 스페인 프리메라리가(2003년 레알 소시에다드 입단) 무대를 밟은 최초의 한국 선수다. 2006년 독일 월드컵 토고전에선 환상적인 프리킥 골을 터뜨려 ‘아시아의 베컴’으로 불렸다. 은퇴 후엔 해설자, 축구 행정가를 거쳐 유튜버로 변신했다. 현재는 그가 운영하는 '리춘수' 채널은 구독자 61만 명을 보유한 '인기 유튜버'다. 심판, 기자, 감독 체험 등 다양한 프로젝트는 물론 축구 꿈나들에게 원포인트 레슨과 조언을 해주는 콘텐트로 팬과 축구계의 공감을 얻었다.
무엇보다 눈치 보지 않고 축구계의 문제점과 부조리를 꼬집는 촌철살인으로 10~20대 팬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이천수는 "나는 축구인이다. 내가 하는 모든 활동이 언젠가 돌아갈 축구계 발전에 도움이 되고 힘이 되길 바란다. 특히 젊은 층이 나로 인해 축구를 더 좋아하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