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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BYE Pele.

  • 23-01-16
GOOD BYE Pele.

안녕하세요. 먹튀검증커뮤니티 토토피아입니다. 오늘은 흥미롭고 색다른 주제로 포스팅해볼까 합니다. 스포츠 토토를 해보신 분, 혹은 한 번도 안 해봤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단어 "축구의 황제 펠레", "펠레"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벌써부터 이미지가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고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떠오르는 인물입니다. 최근에 펠레는 대장암이라는 암투병 끝으로 향년 82세에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펠레는 1958년, 1962년, 1970년 3번의 월드컵에서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어가고, 지금까지 1281골을 넣고 또한 여러 측면에서 세계 기록을 보유해 20세기 최고의 운동선수이자 '축구 전설'로 불린 인물이죠. 이러한 축구역사에 빠지면 안 되는 축구의 황제 올타임 No.1 "펠레" 그 눈과 연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그를 추모하며, 본격적으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프로필> 

본명 : 이드송 아란치스 두나시멘투 (edson Arantes do Nascimento) 

출생 : 1940년 10월 23일(출생) ~ 2022년 12월 29일(사망) 브라질 합중국 미나스제라이스 주 트레스 코라송이스, 브라질 

신체 : 173cm 

주발 : 오른발 (양발) 

등번호 : 10번 

포지션 : 공격수, 공격형 미드필더 

소속팀 

바우루 AC (1952~1956 / 유스) 

산투스 FC (1956~1974) 

뉴욕 코스모스 (1975~1977)


역대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고 있는 축구선수 펠레는 1940년 10월 23 일월 브라질 작은 마을에서 2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펠레 역시 어릴 적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초등학교 졸업 후에 다른 친구들과 달리 생계를 위하여 구두닦이로 시작하여 집안에 생계를 이끌어 나갔습니다. 아버지는 주앙 하무스 두 나시맨투로 별명인 "돈지뉴"로 잘 알려져 있던 축구 선수였습니다. 하지만 지역클럽에서 낮은 급여를 받고 있는 그다지 성공적인 선수는 아니었습니다. 또한 어머니는 매우 엄격한 여성이었으며 아들이 경제적으로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 원했으며, 이에 따라 어머니는 철저히 그에 맞는 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러다 우연히 동네 친구들과 축구를 하게 되다가 펠레는 축구에 큰 흥미를 느끼고 매일 축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머님의 눈을 피해 아버지에게 축구기술과 마음가짐을 배우기 시작합니다. 이때 펠레라는 애칭도 생겨났습니다. 펠레라는 애칭은 아버지가 클럽에서 뛰던 골키퍼 선수였던 빌레에게 유래되어 탄생한 별명입니다. 

이렇게 펠레란 별명이 굳어져버렸고 학교에서도 그를 펠레라 부르기 시작하자 펠레는 이 별명이 마음에 들지 않아 학교에서도 친구들과 싸웠고 이틀간 징계를 받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까지 그를 펠레라 부르게 되자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에 스타가 된 후 그는 펠레란 이름을 신이 주신 이름이라며 감사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펠레가 10살이 되던 해에, 브라질 전역을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바로 <마라카낭의 비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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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카낭의 비극은 1950년 FIFA 월드컵 브라질 4강 결선리그(조별리그 방식) 최종전인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경기에서 앞선 2경기에서 2승을 거둔 개최국 브라질은 1승 1 무를 거둔 우루과이와 비기기만 해도 우승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우승을 예약해 놓은 듯 한껏 분위기가 달아올랐고 초반까지만 해도 선제골을 넣으며 브라질의 분위기가 역대급으로 고조되었지만 후반전 우루과이에게 1:2 역전패를 당하여 우승을 놓치고 맙니다. 브라질 국민들을 큰 충격에 빠뜨린 이 사건은 마라카낭의 비극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때 당시 펠레는 라디오로 경기 중계를 듣다 아버지의 눈물을 처음으로 보았고, 아버지를 위해서 브라질을 월드컵에서 우승시킬 것을, 그리고 우루과이에 복수할 것을 예수상 앞에서 맹세합니다. 자서전에 보면 예수상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며 간절히 기도했다고 나와 있으며, 펠레는 실제로도 신앙심이 매우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펠레는 아버지 밑에서 축구를 열심히 하다가, 아버지 돈지뉴의 전 소속팀이었던 바우루 AC에서 유소년 팀을 만들면서 그 코치로 위대한 멘토 바우데마르 지브리투를 데려와 처음 펠레와 인연이 시작되게 됩니다. 이는 곧 본격적인 축구황제의 전설이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펠레는 14세 때 어린나이에 바우루 AC의지브리투의 소개로 상파울루주의 떠오르는 강팀, 산투스 FC 유소년팀에 입단하게 됩니다. 

당시 산투스 FC는 당시 지투, 페페 등 젊은 선수들을 바탕으로 스쿼드를 꾸려나가던 팀이었습니다. 펠레는 입단하자마자 엄청난 성장세를 보이며 보통 선수들보다 훨씬 빠른 15살이라는 나이에 SC 코린치안스와의 경기에서 득점을 올립니다. 이후 16세부터는 본격적으로 주전자리를 꿰차며 기량을 발휘하기 시작했는데 이듬해 열린 남미 청소년 챔피언십 경기에서는 무려 6경기 11골을 터트리며 대회 득점 왕까지 차지합니다. 이렇게 무서운 성장세로 활동하면서 어느새 펠레는 첫 월드컵을 17세에 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대회직전에 무릎무상을 입어 월드컵 조별리그 2경기를 결장했으나, 3차전 소련전에 처음 월드컵경기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아직 18번째 생일이 지나지 않아 17살이었던 펠레는 역대 최연소 월드컵 출전기록까지 세웁니다. 게다가 8강전 웨일스와의 경기에서 선발로 나와 월드컵 사상 최연소득점 기록도 경신하였으며 준결승 퐁텐이 이끌던 프랑스전에는 단 23분 만에 해트트릭을 까지 해버립니다. 이에 결승까지 올라가 역시 거침없이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55분에 발리슛으로 게임 종료 직전에 헤딩슛으로 브라질의 월드컵 첫 우승에 상당히 많은 기여를 하였습니다. 현재 음바페가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맹활약으로 주목을 받고 있지만 펠레는 더욱더 어린 나이에 엄청난 기록을 세우면서 첫 시작부터가 남들과 다른 존재라는 걸 모두가 알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우리는 재능이라고도 부르곤 합니다. 우승 후 그는 브라질 병역법에 의해 병역의무를 수행합니다. 군인 축구팀에 합류하여 통산 103경기에 출전을 합니다. 군복무 이후 1961년 펠레는 이적소동에 휘말리게 됩니다. 마라카낭에서 열린 플루미넨시와의 경기에서 6명을 제치후 넣은 경이적인 골에 찬사가 쏟아졌고, 이는 곧바로 유럽으로 소식이 빠르게 전해지게 됩니다. 당시 레알마드리드의 회장이었던 베르나베우는 펠레의 영입의사를 밝혔고, 같은 해 이탈리아 인터밀란도 같이 타진해 왔습니다. 그리고 유벤투스 또한 펠레에게 관심을 보였지만 펠레는 이러한 제안을 모두 거절했고, 이적설이 커지자 브라질정부는 펠레를 국외로 유출할 수 없는 국보로 공식 선언을 하고 맙니다. 한편 산투스도 펠레를 달래기 위해 거액의 돈을 마련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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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남미 최고의 클럽을 가리는 리베르타도레스 컵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끈 펠레는 유럽팀과의 대결인 인터컨티넨털컵에서 에우제비오를 만나게 됩니다. 에우제비오의 팀 벤피카와 대결에서 펠레는 유럽으로 건너가 벤피카 홈팬들을 충격에 빠트리며 혼자 무려 3골 1 도움을 기록하였습니다. 이다음 해에 대회에서도 당시 강팀이었던 AC밀란을 상대하며 혼자 2골이나 넣으며 게임을 이끌어갔으며, 대회 2연패를 이뤘습니다. 이렇게 펠레를 주 축으로, 세계축구의 흐름을 선도하는 브라질 리그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리고 펠레가 유럽에서 통하느니 마느니 하는 그런 얘기조차 펠레는 비교를 거부하는 정점에 선 선수였습니다. 한편 1962년 월드컵의 브라질은 지난 대회의 멤버가 건재했고 펠레 또 한 기량이 만개하여 그 누구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다음 월드컵에서 첫 경기 멕시코전에 펠레는 1골과 1 도움을 기록하고 이렇게 2 연속 월드컵 우승을 또 기록했습니다. 이때 펠레의 나이는 무려 21살이고, 여전히 브라질 대표팀에선 최연소였다는 게 놀라운 일이죠. 이렇게 펠레는 이제 전 세계에서 알아주는 슈퍼스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슈퍼스타인만큼 펠레가 출전하면 상대편 선수들의 집요한 마크가 붙기 시작합니다. 더 이상 신인선수가 아닌 이기기 위해서는 꺾어야 할 챔피언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국내경기와 국제경기에서 펠레를 상대하는 클럽은 그의 움직임과 주변선수와의 조화를 방해하는데 힘썼고, 수비수는 시종일관 펠레에게 붙어 거친 플레이를 구사해야만 했습니다. 또는 스포츠맨십에 어긋난 도발을 걸기도 했습니다. 


1966년 월드컵을 앞둔 펠레는 선수로서의 전성기를 맞이했지만 당시 FIFA 측에선 선수들의 대한 보호규정도 제대로 이루어져 있지 않으며, 레드카드와 옐로카드 또한 제도가 없기 때문에 펠레는 수많은 견제를 당하면서 큰 부상을 입게 되고 이는 곧 국가대표 은퇴로 이어지는 큰 사건이 생깁니다. 이에 심각성을 느낀 FIFA는 대응책으로 오늘날의 경고, 퇴장 조항을 도입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팬들과 FIFA의 적극적인 태도에 마음이 흔들린 펠레는 1969년 대표팀에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1969년 펠레는 통산 1000골을 넣으며 브라질 리그의 전설로 등극했고 그의 다음 행보는 월드컵으로 향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월드컵예선전에서 무려 6골을 펠레가 넣으면서 본선에 진출하고 엄청난 활약 속에 3번째 우승까지 손에 쥐게 됩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펠레는 단순한 골잡이에 그치지 않고 축구 그 자체가 되어 노련함, 완숙함을 갖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펠레는 이번월드컵을 끝으로 1971년 대표팀을 은퇴하였습니다. 그 후 소속팀 산토스에서 1974년까지 활동하고 미국의 뉴욕 코스모스로 이적하여 미국 축구 열풍에 크게 기여하게 됩니다. 이때 펠레를 시작으로 베켄바우어, 크루이프 등 유럽의 유명한 스타들이 미국 리그로 많이 넘어와 미국의 축구인기에 큰 힘이 보태었습니다. 

끝으로 통산 1375경기 1284골 엄청난 기록으로 1977년 펠레는 은퇴를 하였습니다. 

펠레는 그저 축구를 잘하는 것을 넘어서, 축구라는 스포츠의 보급, 대중화에 큰 기여를 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축구의 황제 혹은 신과 같은 호칭이 어울리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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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잘 모른다. 음,, 하지만 펠레는 안다 - 마이클 조던 

"신은 펠레에게 모든 걸 주셨고, 나머지 찌꺼기를 우리에게 주셨다" - 호베르투 히벨리누 

"오늘에서야 펠레가 나보다 위대하는 것들 알았다." - 무하마드 알리 

"펠레는 논리의 경계를 초월한 유일한 축구선수이다." - 요한 크루이프 

"세기의 선수를 가리는 논쟁은 말도 안 된다. 답이 이미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펠레다. 그는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고 그를 따라올 사람은 없다." - 지쿠 

"내게 가장 영광스러웠던 때는 월드컵에서 우승했던 때가 아니라 펠레와 함께 뛰었던 때였다." - 프란츠 베켄바우어 

"성공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엄청난 노력과 인내, 배움, 학습, 희생,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다" -펠레- 


이 세상에는 여러 스포츠들이 있고, 각 스포츠마다 거의 신과 같이 추앙받는 존재들이 있습니다. 물론 각 종목마다 한 시대를 대표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선수들이 있기 마련이죠. 그리고 우리는 이런 선수들을 월드 클래스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월드클래스 내에서도 급이라는 것이 존재하며, 이들 조차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존경하고, 인정하고, 찬양할 수밖에 없는 선수들 존재합니다. 그런 선수들을 보통 000의 신이라고 존칭 합니다. 000에는 수많은 종목들이 있지만 우리는 오늘 축구의 '황제', '신' 펠레에 역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펠레 그 는 이제 결코 우리와 같이 축구를 볼 수 없지만, 우리들의 기억 속에는 영원히 축구 영웅으로 기억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고, 사랑하고, 사랑하라, 영원히" - "펠레 유언"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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